3. 통치와 정치
일반적으로 정치는 국가를 잘 운영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지배권력을 피지배자들에게 행사하는 활동으로 간주한다. 정치를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사람은 국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의 복종을 얻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피지배자들의 복종을 끌어내는 것은 과거에는 군주와 구족 등이 보유한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되었다. 오늘날에는 전문적 정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지닌 정당한 권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여겨진다. 만일 정치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관리, 즉 행정 활동과 동일한 것이 된다. 또한 정치를 지배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국가 구성원들이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국가의 행정적 관리로 단순화되는 것도 아니고, 피지배자의 순종을 강제하기 위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활동으로 축소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통치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통치는 구성원들과의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생각을 전제하는 활동이다. 정치를 통치로 여기는 관점에 따르면, 지배자는 피지배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어야 한다. 우월성의 근거가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물리력, 부, 신분, 지식, 도덕적 권위 등 어느 것도 괜찮다. 지배자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또한 통치는 국가의 행정적 관리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관리는 기본적으로 체계의 기능적 운동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것은 체계의 기능적 활동을 가로막는 요인을 제거하고, 구성원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보살피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는다.
서구에서는 근대부터 정치를 국가의 행정적 관리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근대국가는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는 행정적 관리 수단을 다양하게 발전시켜 왔다. 근대국가는 국가의 체계적 기능을 위해 국가구성원들의 생활 습관과 일상적 활동을 관리하고 훈육하는 통치로서의 정치를 일반화시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근대국가의 구성원들은 주권을 지닌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관리를 받아 살아가는 생명을 지닌 인간의 덩어리, 즉 인구로 파악된다.
근대국가에서 인구의 관리는 통치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형성된 국경은 영토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관리할 필요성을 강하게 부각했다. 봉건시대에는 군주의 승계나 유산상속 등으로 국경이 항상적으로 변하였다. 하지만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이러한 변화는 점점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영토의 경계가 명확히 확정되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경우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토가 확정되자 그 안에 거주하는 이들의 숫자도 유동적이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지배자들은 확정된 영토 내의 구성원들을 관리하려는 적극적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인구 관리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지식이 국가통치 기술과 결합하여 국가 내 인구의 효율적 배치와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개인들은 인구를 이루는 부분으로 간주할 뿐이었다. 그들은 지속적 생산활동을 통해 국가의 체계적 발전을 이루어 내는 사물로 취급된다. 다만 휴식, 보건, 복지 등의 지속적 관리를 필요로 하는 생명을 지닌 사물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일반 사물과 다를 뿐이다.
그러나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서는 통치라는 관점에서 국가를 운영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통치가 아닌 정치를 통해서 국가를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정치는 통치와 달리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구성원들 간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졌다. 정치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행위로 이해된다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지배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는 누구도 타인을 지배할 수 없게 하는 법적 질서의 상태, 즉 평등의 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폴리스의 구성원, 즉 시민이라면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구속되지 않는 상태를 법적으로 보장한 상태에서 공적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는 가장 식솔들을 지배하고, 남편 혹은 아버지가 아내와 자식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지배가 허용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정치가 이루어지는 폴리스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상대방에게 지배자의 권력을 행사하도록 용납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자유 시민 모두가 정치적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도 그것을 독점할 수 없었다. 권력의 결집은 폭력이 아니라 오직 토의와 설득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토의와 설득은 부담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고 설득하며 반대할 수 있는 자유를 전제한다. 정치권력은 이상과 같은 자유와 평등 속에서 등장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배력의 독점적 행사나 국가구성원의 훈육 및 관리와 거리가 멀었다.
정치에 대한 이러한 규범적 이해는 아테네인들이 걸어온 독특한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정치에 대한 규범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 그들의 역사적 발자취는 어떠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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