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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실존적 조건에의 직면

by travifountain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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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죽고야 만다는 것이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죽음을 의식할 수 있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죽지 않고 싶은 마음이 고독감과 공허감을 더 느끼게 한다. 심리학에서는 고독감과 공허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묻지만, 철학은 더 근원적으로 이 고독감과 공허감이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서 온다는 것을 설명한다. 실존적 조건이란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 가는 것임을 말한다. 인간이 유한한 시간 안에 던져져 있다는 것이 바로 실존적 조건이다. 스토아학파는 잘 살기 위해서는 잘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키케로는 "철학적으로 되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다. 성어거스틴은 "죽음의 면전에서만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태어난다"고 했다. 중세기의 많은 수도사는 죽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방에 인간의 해골을 놓아두고 그 해골을 통해 얻은 교훈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 몽테뉴(Montaigne)는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예리하고 날카롭게 하기 위해 서재를 묘지가 잘 보이는 곳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인류의 스승들은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 삶을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출발점임을 알려 주고 있다. 

실존철학에서는 죽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인간이 겪는 불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불안을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안이라는 기분에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실존철학자들에게 불안이나 권태와 같은 부정적인 기분은 우리가 세계와 나의 존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들을 파괴하고 사태 자체에 직면케 하는 그 무엇이다. 살아가는 과정이 곧 죽어 가는 과정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당장의 쾌감을 주는 것과 궁극적인 행복감을 주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더불어 어떤 자기가 진정한 자기인지도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죽어 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치밀하게 물어야만 어떤 자기를 실현하고 싶은 것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자기로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는 질문은 '내일 죽어도 지금의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는가?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찾는 동시에 만들어 나가야만 진정한 자기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실존적 조건에 직면하면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죽음이 어쩔 수 없이 다가올 것임을 인정하게 되면 왜 이러한 조건에서 태어났는가를 원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지금의 주어진 조건을 원망한다고 해서 조건이 변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어진 조건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가를 유의미하게 묻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적 조건을 마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기라도 한 것처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니체는 이를 '운명애', 즉 자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태도라고 한 바 있다. 운명애라 하는 것은 운명을 숙명처럼 수동적으로 체념하면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조건을 능동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이다. 실존적 조건에 직면하면 현실적 조건에 매이지 않고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본래적 자기, 즉 진정한 자기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진정한 자기, 자기 자신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낯선 자기 자신을 만나기도 한다. 나 자신이 이랬던가 하면서 스스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기도 한다. '나'이기는 하는데 나에게도 낯선 '새로운 나'를 자꾸 만나면서 그 '새로운 나'에게서 나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안을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가를 점검하고 나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지 않는 나의 모습을 탈각시켜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안이란 계속 지속될 수 있는 평안, 나에게 편리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 평안을 말한다. 

진정한 자기를 어떻게 찾아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전거 타기'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본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 타는 법을 알고 타는 것이다. 아니다. 우선 타고 넘어져 가면서 자전거로 중심을 잡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도 어떠한 '나'가 '진정한 나'인지를 알기 어렵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보면서 어떻게 행동할 때 자신이 가장 편안한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하면서 중심을 잡아 나가는 자전거 타기처럼 좀 더 편안한 자기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전거로 중심을 잡는 법을 체득하고 나면 유쾌하게 바람을 즐기며 자전거를 탈 수 있듯이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타인의 시선에 매이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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