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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자기실현의 행복

by travifountain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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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등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깨우쳐서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면서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다울 때 행복하고, 나는 나다울 때 행복하다. 이에 대해서는 왜 그런가 하는 근거를 요구할 수 없다.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때 행복한 것은 인간 누구나 경험하는 자연적 사실이다. 자신의 가능성 실현이 구조적으로 막힐 때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도대체 어떨 때 나답고 인간다우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대체 어떤 것이 나다움이고 인간다움이냐 하는 것이다. 나는 나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 세상이 사과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해서 오렌지인 내가 사과가 되기를 바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오렌지는 오렌지일 때 좋은 것이다. 사과 비슷한 오렌지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나만의 고유성, 나만의 향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도대체 나답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내가 나인데도 정작 내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가 많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를 알기가 어렵다. 

나다울 때 행복하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기는 하다. 자신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일을 할 떄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잘 펼치게 된다. 인간 누구나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할 때 즐겁고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할 때 괴롭다. 자신의 능력이 잘 펼쳐질 때 자아실현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말의 '신난다'는 표현은 자신만의 내적 특질이 그 고유성에 맞게 실현될 때 사용된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재미를 느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게 되는 것에는 자신만의 고유성이 실현된다는 특성이 들어 있다. 심리학자 탈 벤 샤하르는 행복은 재미와 의미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고 했다. 재미는 자신만의 특징적인 고유성이 실현되어 자신의 고유성이 확인됨으로써 얻어진다. 의미는 그 행위가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가치 있다는 것이 확인될 때 얻어진다. 재미는 자신의 능력을 전개할 수 있을 때 얻어진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쉽게 되는 것'에서는 흥미를 느끼기 어렵다. 단순한 감각적 욕망의 실현에는 주체의 노력이 별로 들지 않는다. 행복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실현하는 상태'이다. 자기를 실현하는 데 자신의 노력이 들면 들수록 이 과정이 정말 자기 실현의 길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당사자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을 뚫고서라도 그 길을 가는 것을 볼 때 그 길은 그 사람에게 자기실현의 길임을 관찰자들이 알 수는 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회의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길을 가고자 하고 어려움을 이겨 가려는 자신의 욕구가 단순한 성공에의 욕구인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욕구인지를 판단하기도 어렵다.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행동과 그것에 수반되는 쾌락'을 느낄 때 인간은 행복감을 맛보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자신의 본질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행동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본질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행동을 통해 얻는 것은 행복감이지 쾌감이 아니다. 행복을 거론할 때 자주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쾌감과 행복감을 어떻게 구분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통상적으로 쾌감은 본능적 충족과 연관되고 일시적인 데 비해 행복감은 깊은 내면의 자기와 연관되고 지속적이라고 구분한다. 물론 행복감이 단시간에 집중적으로 느껴지면 쾌감으로 경험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쾌감이고 무엇이 진정한 행복감인가를 구분하는 문제도 역시 진정한 자기가 무엇이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일시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실현할 때는 쾌감을 느끼지만, 지속적이고 깊은 내면의 자기, 즉 진정한 자기의 욕구를 실현할 때는 행복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자기의 내용이 사람마다 다르므로 어떤 때 행복한가는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자기실현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떤 자기가 진짜 자기인지를 알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어떤 자기를 실현해야 하는가? 무언가를 먹고 싶은 자기? 자고 싶은 자기?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자기? 우리는 어떤 자기가 진정한 자기인지를 판단하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나답게 살 수 있을 거시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할 것이다. 타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목소리 말고 나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할 것이다. 자기의 내면에서 분명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따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한 내면의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지 않는 경우에는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자기실현에서 특정의 타자를 통일시 하여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각에 입각한 선택에 의해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냐의 문제는 중요한 차이다. 동일시에 빠져 형성하는 자기는 자기실현의 '자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자각적 선택으로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 자기실현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을 "알 수 없는 심연"이라 하고 니체는 "덮여서 감추어진 하나의 어두운 존재"라 한다. 알 수 없는 심연에서의 울림을 잘 듣는 것, 감추어진 어두운 존재로부터 울리는 소리를 잘 듣는 것, 그것이 어렵다. 이 어두운 밝혀지지 않은 근원을 직시하고 마주하는 일은 큰 용기가 있어야 한다. 실존철학에서는 본래 자기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될 때는 '이게 아니다'라는 미제의 느낌이 들며, 본래 자기에 맞는 행동을 할 때는 '바로 이것이다'라는 확신이 생긴다고 본다. 이러한 실존적 명령을 순수하게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실존적 조건을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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