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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플라톤의 에로스

by travifountain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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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도 에로스를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관점과 달랐다. 당대인들의 에로스는 장점을 지닌 구체적 인격에 대한 욕망이었지만, 플라톤의 에로스는 추상적 가치에 대한 열정의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상대방이 지닌 아름다움에 끌려 사랑의 욕망을 불태웠다. 그러나 플라톤은 특정 인격 속에 제한되어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의 욕망을 품었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이러한 입장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랑은 포로스와 페니아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포로스는 지혜의 방책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신이다. 반면에 페니아는 결핍의 신이다. 포로스가 술에 취해 잠든 사이에 페니아는 몰래 포로스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에로스였다. 에로스는 포로스와 페니아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지혜의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갖출 수 없었다. 어머니의 본성을 이어받아 결핍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로스는 포로스의 아들이므로 늘 지혜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진취적으로 노력한다. 그런면에서 에로스는 지혜와 무지 사이에 존재하면서 완전한 지혜를 위해 정신의 모험을 감행하는 중간자이다. 그는 선하고 지혜로우며 아름다운 영혼을 완전하게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정신의 상승을 추구한다. 이렇게 볼 때 에로스는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결합한다는 단순한 환희에 빠져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혼의 완전성, 추상적 미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발휘하는 자이다. 즉 플라톤에게 사랑은 헤어진 자신으로 상정된 대상을 찾으려는 열정이 아니라, 영혼의 완전한 상승을 위해 바쳐지는 열정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토닉 러브의 의미이다. 

이처럼 플라톤이 말하는 사랑은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그려내는 모습과 다르다. 그것은 실제 존재하는 두 연인의 애정 관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영혼의 성숙과 연관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적 사랑이 실제적 애정 관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우리는 그것을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의 관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난 알키비아데스는 어린 시절 빼어난 외모로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사랑을 얻고자 소크라테스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 밤늦도록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어린 소년과 나이 먹은 남성 간의 동성애가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동성 간의 에로스적 관계는 소년이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는 데 도움을 준다고 여겨졌다. 이 관계에서 소년은 자신의 원숙한 애인에게 싱그러운 젊음과 청춘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그의 원숙한 애인은 자신이 가꾸어 온 탁월한 기량을 소년에게 바친다. 이러한 풍습에 따라 알키비아데스는 평소 흠모하던 소크라테스에게 연인 관계를 제안하였다. 즉 자신의 외모적 아름다움과 소크라테스가 지닌 지혜로운 영혼의 아름다움을 서로에게 헌사하는 에로스적 관계를 맺고자 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에로스에 대한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에로스는 특정 인격의 미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완전한 영혼, 아름다움 자체를 이루기 위한 자발적 노력에 의해 전개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누군가가 지닌 미덕을 선사받아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 정신의 성숙을 이루려는 타성적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태도로는 에로스적 열정의 참된 전개는 가능하지 않다. 겉으로는 정신의 완전성과 상대방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지만, 사실 그것은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채우려는 이기적 욕망을 품고 있다. 또한 성숙한 영혼을 갖춘 연인에 대한 존경은 그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로 변질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일 수 없다. 사랑의 관계란 아름다운 인간관계여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를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종속인으로 삼아 버리는 주종관계가 아름다운 인간관계일 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애정관계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성숙한 사랑도 알키비아데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빼어난 사람을 만나 존경을 통해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를 수단으로 여기면서 자기의 결핍을 메우려는 이기적 욕망을 은폐하고 있다. 연인의 부를 빌려 나의 가난을 채우고, 연인의 지혜를 빌려 나의 무지를 메꾸며, 연인의 아름다운 영혼을 수단으로 삼아 나의 아름답지 못한 영혼을 가리려는 이기적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더 나쁜 것은 연인에 대한 헌신과 존경이라는 미명 아래 이것을 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자신을 비천하게 만들고 자아의 능동성과 독립성을 해친다. 그리고 어리석은 숭배는 사랑하는 연인을 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오만한 지배자로 만들어버리는 일을 초래한다. 성숙한 영혼으로의 상승은 나보다 높은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성을 지향하는 영혼의 자발적 욕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러한 자발적인 정신의 성숙을 함께하는 동반자이다. 그는 미덕이나 해답을 제공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정신의 모험을 계속하도록 촉구하는 자이다. 자신의 연인을 이렇게 이해하면 나와 그의 사랑 관계는 동등한 자유인의 관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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