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은 그 사상적 배경과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날까지 많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유가사상이 갖는 문제의식들과는 사뭇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데는 크게 이의가 없다. 실제로 이들은 도덕규범 체계가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되어 버린 자신들에게 압제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유가사상의 한계를 그 근본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도가사상은 흔히들 오해하듯 도피와 안일의 철학이 아니라 발생적으로 이미 사회 현실에 대한 투철하고도 신랄한 비판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유가에서는 인의예지가 원래부터 하늘의 원리인 원형이정에 뿌리박고 있고 그것을 훌륭한 성인들이 뛰어난 통찰력으로 사람의 도리로서 찾아낸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인간이 자기 처지에 맞추어 인위적으로 꾸며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우주의 중심이라는 유가의 주장 역시 자연의 본래의 모습과 하등 상관없는 인간만의 자의적 생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도가사상가들은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배적 지위를 누린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자나 장자의 많은 논설은 인간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예컨대 장자는 이 넓은 우주에 비교할 때 인간이란 존재는 쇠꼬리의 털에 붙은 벌레의 알보다도 미미한 존재라고 말한다. 우주에 비교하면 인간의 전쟁이란 마치 달팽이 뿔에 둥지를 틀고 있는 두 나라의 싸움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우주 자연은 얼마나 광대하고,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이 자신만이 가장 우월하다고 뽐내고 있지만 광대한 자연의 품속에서 인간이나 동물이나 사물이나 다 똑같다. 어느 것 하나 잘난 것이 없다. 유가는 도덕을 말할 때 덕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노자에게 덕은 "도를 드러내는 작용 내지 만물이 도를 드러내는 능력"으로서 인간과 사물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도가의 만물제동 사상이다. 그리고 하늘이 인간만을 특별히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노자에 의하면 하늘과 땅은 결코 어질지 않으며 만물을 그저 짚으로 만든 개처럼 내버려 둘 뿐이다.
성인들이 자연의 도라고 찾은 것은 자연의 도가 아니라 가짜 도이므로 성인들이 가르친 지식을 버리면 버릴수록 백성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고, 이른바 인의예지라는 예의법도 또한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백성들의 효심과 자애로움이 커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배움 일체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므로 그 배움을 끊는 것이 오히려 온갖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 깨달은 이치로 만물과의 차별심을 가지고 인간 중심적으로 자기가 잘났다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것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고 우주를 구성하는 평등한 일원으로서 다른 존재자들과 우주적 연대감을 갖고 함께 더불어 우주적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노자는 하늘의 도는 언제나 무위이되 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연의 이치에 합당하게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은 하되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좁은 소견으로 꾸며 낸 인위적인 것은 행하지 않는 삶이다. 그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 만물이 어울리는 원리를 찾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이 우주와 어울리는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자를 보면 그와 같은 삶을 잘 말해 주고 있는 한 구절이 나온다. 생산하되 소유하지 않고 활동하되 자랑하지 않으며 성장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인위적인 아집을 깨고 사물과의 본래의 우주적 관계 속으로 스스로 편입해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물과 자신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다. 자기를 해체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이되 우주와 하나 되어 자신이 우주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동파가 적벽부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이 하나이니 그 무엇을 또 부러워할 것인가"의 경지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자기의 좁은 소견이 꾸며낸 것들을 마치 의미 있는 것인 양 착각하여 인위 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결국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설사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도가에 의하면 삶의 불행은 사람들이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집착하는 데서 나온다.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뒤따르는 것이다. 노자는 집착하지 말아야 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덕이고 지식이라고 말한다.
노자가 권유하는 삶은 투쟁과 축적이 아니라 자기를 풀어놓는 능력 증여의 능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을 갖되 우주적 욕망으로 우주와의 연대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이웃들을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스스로를 해체하여 타자의 관계 속으로 스며들어 자신과 타자를 살리는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부드럽고 유약하지만 세상 만물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강한 것이다. 강하고 경직된 삶의 태도는 그 강함으로 자신 하나는 지킬 수 있을지언정 타자를 상하게 하고 그 상한 타자가 키운 또 다른 경직에 의해 스스로도 다치고 만다. 그래서 견고하고 강한 것은 결국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그러나 도가는 무위의 태도를 통해 어떤 세계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비전은 제시하지 않는다. 부정과 초극의 정신으로 충만한 도가는 타성적 질서를 파괴하는 데는 좋은 도구이지만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는 도구로는 약하다. 도가의 자연주의적 관점은 인문 문화의 병폐를 반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인간이 인위적 문명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가의 우주적 상상력은 우리의 안목을 확장하여 기존의 세계상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 주지만 그로부터 전망 있는 새로운 세계상을 명료하게 그려내기는 어렵다. 새로운 이성적 질서의 건설 작업은 아마도 도가사상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가가 좀 더 보편적인 철학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이며 도가의 치명적 약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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