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은 이성을 감정의 노예로 본다. 흄은 이성과 정념을 구분하면서도 인류의 행복에 대한 감정과 인류의 불행에 대한 분노는 좋은 정념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인간은 단기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정의롭지 않게 행동하고 싶어지는 존재이다. 흄은 장기적 이익을 망각하는 이러한 성향을 영혼의 편협함이라고 칭한다. 흄은 인간의 주요 특질이 사회의 영향을 받기 전에 이미 결정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바뀐다고 해서 인간의 특질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회가 바뀌면 인간도 바뀐다고 보는 마르크스의 생각과는 대조된다. 흄에 따르면 사회는 인간 본성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관습을 통해 해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을 변화시켜서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곧바로 직접적인 이익을 얻게 하고 정의를 어기는 사람은 이익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일뿐이라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관습을 어길 때의 불이익 때문에 인간의 관습은 점진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행동하고, 또 누구나 타인들도 유사하게 행동하리라는 예측에 입각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보트에서 노를 젓는 두 사람은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계속 노를 저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도 노를 젓는다. 상대방이 노를 젓지 않을 경우 보트가 침몰할 위험이 있으므로, 즉 상대방 본인도 위험해질 것이므로 상대방 역시 노를 저으리라는 예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노를 젓지 않음으로 인한 위험이 노를 젓지 않음으로 인한 편익보다 크므로 노를 저으리라 믿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예측이 습관화되면 관습이 된다. 이리하여 인간의 공동생활은 습관과 관습의 지배를 받게 된다. 약속을 지켰을 때의 이익과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불이익을 비교 형량하여 필요한 관습이 정착되어 왔다는 것이다.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정념에 관하여에서 이성만으로는 어떤 의지적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정념에 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는 칸트와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첫 번째 주장은 이성이 아무리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이성 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A라는 행동이 B를 일으킨다고 하자. 이 인과관계를 아무리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B를 원하지 않으면 A라는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과 그 행동을 실제로 할 것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욕구도 없는 단순한 지적 이해만으로 행위를 일으킬 수는 없다. 동기가 있어야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은 이성과 정념이 싸울 때 이성이 정념을 이길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을 통해 사물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고 욕구로 인해 행동하게 된다. 우리가 욕구하는 것을 얻어 내는 방법을 찾을 때 사물의 관계를 인식하는 이성을 활용한다. 어떠한 욕구나 선호도 비합리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고 이성에 의해 변화될 수 없다. 이성은 주어진 목적에 대한 수단을 모색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으나 적절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는 있다. 우리가 사회에 의존적인 까닭은 서로 협력함으로써 우리의 허약함을 채울 수 있고 강력함을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어떤 동물보다도 인간에게 가장 많은 욕망과 욕구를 부여했으면서도 이것들을 충족시키기에는 가장 미약한 수단을 부여했다. 흄에게는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습성에 기초한 경험적 추론, 즉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다. 흄의 입장을 따른다면 인간은 습성에 기초한 경험적 추론이 단지 다른 동물보다 조금 더 고도화된 동물일 뿐인 존재가 된다.
흄이 보기에 인간은 무엇이든 규칙화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질 때 우리는 그 관념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의 관념이 있으면,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정신은 함께 발견되는 것을 연관시키는 기능을 한다. 흄이 보기에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 부르는 것은 다른 인간들에 대한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의 연상작용이 어느 정도까지 경험의 결과이냐 하는 점은 철학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은 인식하는 자아의 특별한 기능 없이 인식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정말 어떤 타고난 경향이나 성향 없이 인간의 마음이 세계를 범주화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 우리의 경험만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흄은 자아는 관념의 흐름을 통해 우리가 상상해 낸 허구라는 입장이다.
흄에 따르면, 내가 나 자신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내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지각뿐이다. 나 자신의 생각, 느낌, 소망 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나의 자기 자신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인상들이나 관념들이 아니라 그 인상이나 관념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자아에 대한 경험은 누구도 하지 못한다. 우리가 기억으로 지각들 사이의 인과관계나 유사성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아가 동일하다고 믿게 될 뿐 정말 자아가 동일성을 유지하는지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흄은 사람들이 자아의 동일성을 지각의 동일성으로부터 확보하려 한다고 보았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한 것은 어제 내가 가진 지각과 오늘 내가 가진 지각이 동일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속적인 지각들에 동일성을 부여하는 근거, 즉 연속적인 지각들을 나의 지각의 묶음이라고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야 자아동일성이 확인되는 것일 터이다. 흄에 따르면 어떤 지각이 계속 연속된다고 해서 그 지각이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다. 즉 우리가 자아동일성을 상정하는 것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우리의 사고 습관이라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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