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고대 유가사상은 기본적으로 도덕과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 공자하면 생각나는 것이 우선 성인의 삶, 도덕적인 삶이다. 오죽하면 행위지침에 있어 딱 옳다고 생각되면 공자님 말씀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왜 공자는 도덕을 강조할까? 사실 도덕적으로 살기가 쉽지 않고 그렇게 산다 한들 힘만 들고 행복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공자는 도덕적으로 살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은 물론이고 자기에게도 행복과 기쁨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공자는 원래 인간의 본성이 도덕적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즉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자신의 도덕적 본질을 발휘하는 삶이고 그렇게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는 그만큼 만족스러운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의 결정적인 근거로서 '인간 본성이 도덕적'이라는 것이 진실임이 설득력 있게 뒷받침되지 않는 한, 공자의 주장은 헛구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가는 우리를 둘러싼 우주 자연을 평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유기체로 파악한다. 누가 보더라도 우주는 그 안에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생육하고 보살핀다. 그러한 생명력이야말로 선한 것 중에서 가장 선한 것이다. 그래서 유가는 우주 자연의 생명력을 어질다거나 성실하다고 표현한다. 이렇듯 유가에서 우주 자연은 지극히 선한 것, 최고선이다. 그리고 유가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어떤 입장에서건 인간이 우주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연의 속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자연에 깃든 생명력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자연의 생명력이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양육하고 번성하게 하는 한, 자연은 인자한 것이고 그러한 자연의 본성을 안고 태어나는 인간 또한 선한 존재이다. 요컨대 유가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다. 자연은 조화와 질서를 갖추고 있는 영원한 것이며,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일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연의 조화와 질서의 원리가 다름 아닌 도이다. 따라서 우주와 자연의 원리에 일치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고 선한 삶이며,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내 안에 존재한다.
물론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육체와 같은 기적 질료가 있고, 그것에 기인하는 욕망과 본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과 달리 비록 기질을 갖고 있지만 그 기질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에 그 어느 동물보다 순화된 욕망 및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의식 주관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면서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선하디선한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삶의 참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유가는 인간을 하늘과 당과 함께 우주를 떠받치는 세 기둥의 하나로 여긴다. 유가사상을 기본적으로 인본주의 사랑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식 주관의 수양과 반성을 통해 이 자연의 생명력을 얻을 수 있으며, 사회적인 삶 속에서 도덕 실현함으로써 태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영원함과 합치되어 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천성에서 부여받은 본성으로서 인은 본래 씨앗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차 나무로 자라고 개화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은 이미 인의의 원리에 따라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는 절제능력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유가사상의 목표는 천인합일이다. 그것이 군자가 살아가면서 서 있어야 할 근본 지표이다. 이러한 도덕적 삶, 곧 인간이 가야할 길,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 가는 길이 말 그대로 유가의 도이다.
그렇지만 유가사상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러한 생각과 주장이 옳다고 해도 도덕적인 삶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적 명령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당위적 주장을 뒷받침하고 현실화 시키는 구체적인 도덕적 삶의 덕목, 즉 실천지침이 제시되어야 한다. 도대체 도덕적으로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다는 것인가? 그에 대해 유가는 한마디로 하늘의 원리와 일치하는 "인의예지에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훗날 주자가 유가의 핵심을 정리한 것처럼 원형이정이 천도의 원리라면, 인의예지는 그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도리이다. 그리고 개인이나 사회와 그와 같이 인의예지에 따라 조화와 질서를 갖추어 가면 그것이 곧 군자이자 정의로운 사람이요, 덕이 지배하는 바른 사회이자 바른 국가이다.
유가는 통찰력이 부족한 보통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은 옛 성인들의 삶을 배우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친다. 스스로를 신실하게 잘 다스리고 충만하게 하여 늘 예에 따라 살아가면 그것이 하늘의 본성이자 인간의 본성인 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로써 자기를 충실히 하고 인을 완성하면 저절로 타인을 자기와 같이 이해하게 되고, 그 충실함에 기초하여 타인을 너그럽게 이해함은 물론 베푸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유가사상의 요체로서 충서의의미이고, 지배 엘리트들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의미이자, 지배군주가 지향해야 할 지상의 덕목으로서 내성외왕의 의미이다. 일찍이 공자는 이러한 인의예지의 왜곡 가능성을 내다보고, 아무리 예가 중요해도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경계했음에도, 유가사아은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적 정황은 물론 이후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도 종종 패도적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봉건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안타까운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 경우, 도덕은 그야말로 행복의 원리이기는커녕 고통을 증대시키는 억압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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