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는 사랑의 신이다. 그것도 열정적 사랑의 신이다. 에로스의 화살을 맞으면 그 누구도 사랑의 열정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에로스는 특정한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갈망하게 만든다. 이 갈망의 열정을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일 뿐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런 경지에 빠지게 되는가?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이야기한다.
"본래 사람은 세 종류로 나뉘어 있었네. 남성과 남성, 남성과 여성, 여성과 여성이 한 몸에 붙어 네 개의 손발과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었지. 하나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얼굴은 서로 반대 방향을 보고 있으면서 네 개의 손발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이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네. 그리고 힘이나 활력이 엄청나 자신들을 대단히 여겨 신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네"
그리스의 신들은 언제나 인간의 오만함에 가차 없는 징벌을 내린다. 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계속 살아 있으면서도 힘이 약해져서 방종을 멈추게 될 수 있을지 그 방도를 나는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그들을 둘로 자르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얼굴과 목을 잘린 쪽으로 돌려놓도록 명령하였다. 분리를 초래한 상처를 보게 함으로써 다시는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인간의 힘은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둘로 쪼개진 인간은 사라진 다른 한쪽을 그리워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 그들의 본성이 둘로 잘렸기 때문에 반쪽 각각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줄곧 만나려 들었네. 서로 팔을 얼싸안고 한데 뒤엉켜 한 몸으로 자라기를 욕망하다가 결국에는 상대방과 떨어진 채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어서 혹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죽어 갔네. 바로 그래서 그토록 오래전부터 내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인간들에게 나면서부터 들어 있게 되고, 그것은 옛 본성을 함께 모아 주며, 둘에서 하나를 만들어 내어 인간 본성을 치유하려 노력하네"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서 사랑은 결핍에 대한 충족을 지향하는 열정이다. 본래 하나였던 인간이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는 열정이라는 것이다. 남성끼리 결합되어 있던 사람은 남성을, 여성과 결합되어 있던 사람은 여성을, 이성끼리 결합되어 있던 사람은 이성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사랑이란 분리와 결핍의 고통에 대한 치유의 행위이다.
<바타유>
이와 비슷한 생각을 우리는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타유는 인간은 잃어버린 연속성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엄마 배 속에서 엄마와 한 몸이었던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혼자가 되며 고독하게 죽는다. 그리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독립적 지위와 위치를 점하면서 저마다의 인격으로 살아간다. 서로가 자유로운 존재이고 독립적인 존재이기에 "어떤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으며, 거기에는 단절이 있다." 이 단절과 불연속은 인간에게 분리의 현실에 대한 원초적 불안과 합일과 연속에 대한 그리움을 품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우연한 개체, 덧없이 소멸하는 개체로 떠미는 현재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존재가 되기 위한 갈망을 품는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존재의 연속에 대한 향수로 인해 단순한 생식활동과는 다른 에로티즘이라는 문화적 양상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했다. 상실한 합일에 대한 열정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족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육체적 결합과 심정적 결합을 이루면 불연속적인 그들이 완전한 융합에 이르고, 그러면 그들이 연속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치와 합일의 열정을 현실에서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열정에 묻히면, 사랑에 빠진 사람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미친 듯이 융합을 실현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그 융합의 이미지의 투영 너머로 개인적 에고이즘이 고개를 쳐들면서 융합은 현실적으로 덧없는 것이 되고 만다. 동시에 격렬한 그 융합은 대부분 고통을 낳는다. 서로 썰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그 고통은 우리의 의식을 꽉 메우기에 이른다.
근대철학은 인간을 독립적 개별자로 보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이 본래 '존재의 거대한 사슬'로 이어진 존재라는 고대 및 중세적 생각과 상이하다. 인간이 우주 혹은 신과의 합일 속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고대 및 중세인과 달리 근대인들은 인간이 우주 혹은 신이라는 실재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 조건은 실존이라는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실존은 라틴어 exsistere에서 기원한 말이다. 이 말은 ex-와 sistere가 합쳐진 단어이다. ex-는 '~에서 밖으로 멀리 떨어져 나와'라는 뜻이고, sistere는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지녔다. 따라서 인간이 실존이라는 생각은 인간이란 '무언가로부터 밖으로 멀리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원래 하나로 합일되어 있었는데 홀로 떨어져 나와 존재하게 되었으니 인간이란 고독한 존재이다. 고독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인간은 일치와 합일을 갈망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실존이라는 존재 조건이 초래한 고통을 치유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갈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바타유가 지적했듯이 합일의 열망은 이루어질 수 없다. 사랑을 통해 이 분리의 사실성을 초월하려 들지만 그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수많은 사랑의 사례 속에서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서로를 절대적으로 갈망하던 연인들이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서 일치와 합일보다는 분리를 소원하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목격하고 있는것이다. 결합은 권태를 부르기 마련이다. 그들은 연인들의 모순적 행태로 미루어 볼 때, 상대방과의 사랑의 결합이 합일의 열망에 대한 치유책이라는 아리스토파네스적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다.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 쾌락의 역설 (0) | 2023.03.28 |
---|---|
플라톤의 에로스 (0) | 2023.03.27 |
도가와 자유로운 삶 (0) | 2023.03.26 |
유가와 도덕적 삶 (0) | 2023.03.24 |
프로이트의 인간관 (0) | 2023.03.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