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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로이트의 인간관

by travifountain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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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프로이트를 빼놓고 논의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 대한 이해의 방향을 이성 중심에서 욕망 중심으로 바꾼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이다. 인간이 어떻게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이성은 어떻게 욕망의 꼭두각시가 되는가를 상당히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 이후 어느 누구도 인간의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할 때가 많다. 자신조차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행동의 이유를 찾을 때 사실은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한 이유가 진짜 이유인지 확인하지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인간을 결정짓는다고 보았다. 인간의 정신에는 무의식의 층과 의식의 층이 있는데, 무의식의 층이 의식의 층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사실 '의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비의식'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무의식이 의식이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의식하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의식하면 괴로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모습을 의식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의 정신이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이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편한 방식으로 생각하기 불편한 방식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쉽게 편해지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불편한 것은 의식으로 떠오르게 두지 않는다. 의식으로 떠오르게 두지 않는 것을 억압이라 한다. 불편한 생각은 억압되어 무의식의 층으로 내려가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세계에는 스스로를 불편하게 하는 생각이나 기억을 의식의 표면 위로 떠 오르지 않게 가라앉히는 방어기제가 있다. 무의식이 의식을 결정짓는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쉽게 말해 '내가 모르는 나'가 '내가 아는 나'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타인을 보면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바와 실제의 그 사람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많이 목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즉 나 역시 '내가 모르는 나'가 '내가 아는 나'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반갑지 않은 소리이다. 남들에게서 발견하는 그러한 불일치가 나에게도 있다는 소리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불일치는 자기 자신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무의식으로 억압시킨 이유가 그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므로 정신은 그 불일치를 볼 능력이 없다. 보기 싫어서 눈을 감은 부분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눈을 뜨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 경우 눈을 뜨는 것을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한다.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만큼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진다.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소리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숨기고 싶은 모습을 가진 타인을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게 되는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의식은 무의식이 결정짓고 무의식은 성적 본능 및 공격성이 결정짓는다. 성은 인간이 경험하는 최초의 만족이고, 이 만족의 기억을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물론 성이 중요한 인간 행위의 동기라고는 했지만 성적 동기가 유일한 동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성적 동기가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매우 역동적인 힘이며 성적 요인이 노이로제 질환의 주요 요인이라고 믿었다. 무의식은 리비도(libido)라고 하는 성적 에너지의 움직임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인간의 내면에서는 이드(id), 에고(ego), 초자아(superego)의 힘이 갈등하고 있다. 이드는 리비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부분이고, 에고는 이성과 상식으로 불리는 부분이며, 초자아는 양심의 판단 작용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중 에고는 의식에 해당하고 이드와 초자아는 무의식에 해당한다. 무의식의 억압이 풀리는 만큼 이드와 초자아 중 일부가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드, 에고, 초자아의 갈등이 너무 심하면 노이로제(신경증)를 앓게 된다. 일상적인 물건을 예사롭게 보지 못한다든가 손을 강박적으로 씻는다든가 사람을 기피한다든가 남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상한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에고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무의식이 에고, 즉 내가 아는 나를 결정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나 자신을 내가 다 모른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이드와 초자아는 물론 외부 세계로부터도 통제를 받게 된다. 이드는 만족을 요구하면서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를 막으려 한다. 초자아는 양심과 도덕감의 형태로 에고를 통제하려 든다. 양심과 도덕감은 가족과 사회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 무의식에서는 이드와 초자아가 충돌하고 있는데 '초자아가 이드를 누르는 부분'과 '초자아가 이드를 누르지 못하는 부분'이 어떻게 섞여서 무의식이 형성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에고가 달라진다. 그리고 이 에고는 외부 세계와도 관계를 맺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현실에서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면서 초자아와 이드의 결합체인 무의식과 관계해야 한다. 무의식과의 관계 설정, 외부 세계와의 관계 설정 방식에 따라 에고는 그 내용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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